의대 대신 기타를 든 남자, 윤형주의 이야기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더 안전하고 인정받는 길이 눈앞에 있지만,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일 때. 윤형주는 그 순간, 의사의 길을 내려놓고 노래하는 사람의 길을 택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그가 결국 음악을 향한 열정을 따라간 건, 어쩌면 운명처럼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예술과 학문이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영문학 교수, 어머니는 성악가. 그 속에서 윤형주는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익히고, 문학과 음악에 둘러싸여 자랐다. 조용히 흐르던 음악적 감수성은 경기고 시절 성가대 활동으로 확장되었고, 그곳에서 조영남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하지만 주변이 뭐라 하든 그는 결국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그는 연세대에서 경희대 의대로 옮겼다가, 끝내 중퇴하고 음악에 모든 걸 걸었다.

그의 음악 여정은 ‘트윈폴리오’로 시작됐다. 송창식과 함께 결성한 이 듀오는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슬픈 운명’ 같은 명곡을 남기며 60~70년대 포크 음악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기타 하나로 시대를 노래하고, 감정을 전하던 그 시절, 윤형주는 ‘세시봉’의 상징이자 수많은 청춘의 우상이었다. 부드러운 미성과 세련된 외모, 명문가 출신이라는 배경까지 더해지며, 그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트윈폴리오 해체 후, 그는 홀로서기를 택했다. ‘비와 나’, ‘조개껍질 묶어’, ‘고백’처럼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명곡을 발표하며 솔로 가수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특히 ‘조개껍질 묶어’는 강릉 경포대 해변에서 친구들과 놀다 즉석에서 만든 곡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게 됐다. 윤형주는 단지 노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곡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CM송의 거장이기도 했다. ‘CM송의 전설’이라 불릴 만큼, 무려 1,400곡에 달하는 광고 음악을 작곡했다. 우리가 무심코 들었던 광고 음악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일상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우리의 기억에 남는 그 짧은 멜로디들. 윤형주는 그렇게 늘 곁에 있었다.
음악 무대 밖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빛났다. ‘열린 음악회’의 초대 MC를 맡아 따뜻한 말투로 시청자들을 위로했고, 수많은 라디오와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약하며 방송인으로서의 입지도 다졌다. 동시에 그는 대중문화 기획자로서도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며, 흐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사회공헌에도 힘을 쏟았다. 1994년부터 한국해비타트 활동에 참여해, 2017년에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소외된 이웃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직접 현장을 누볐고,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등 다양한 단체의 홍보이사로도 활약했다. 단지 유명세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영향력을 나눔의 도구로 쓰고자 한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는 따뜻한 가장이었다. 김보경 씨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고, 막내아들 윤희원은 가수로 활동 중이다. 시인 윤동주와는 6촌 사이로, 가족 모두가 예술과 학문, 종교에 헌신해온 집안에서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그는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현재 온누리교회 장로 봉사 중이다.

세월이 흘러도 윤형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윤형주의 쎄시봉 콘서트’ 같은 공연 무대에 오르고, 유튜브에서도 그의 음악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에게 음악은 여전히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고, 사람들과 이어지는 연결 고리다.
돌아보면, 수많은 길 중에서 그는 가장 ‘윤형주다운 길’을 걸어왔다. 의사라는 안정된 미래를 내려놓고, 기타를 들고 무대로 향했던 순간. 그 선택은 단지 개인의 용기가 아니었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에 하나의 줄기를 만들고, 수많은 이들에게 마음을 건넨 선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택한 이 길 위에서, 여전히 윤형주의 노래를 듣는다.



